이 책은 처음부분엔 정말 흥미롭게 읽다가 과학을 지나가면서 정말 지루해졌다. 하지만 사피엔스의 종말 부분에는 참을 수 없는 긴장과 공포가 몰려온다.
22000원. 총균쇠와 관련 있단다 - 앞으로 읽어볼것

인간은 슬프게도 과학 문명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데에는 성공했고 앞으로 성공할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을 행복으로 연결시키는데 실패했다. 아니면 관심이 없을지도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전은 지구 생태계도 적응할 시간이 없어서 막대한 파괴와 피해를 입혀왔고 지금도 입히고 있다.

또한 과학 기술은 새로운 생명의 창조를 머지않아 가능케 할 것이고
우리는 새로운 첫 세대에게는 적어도 우리가 선택한 가치, 지식을 주입할 수 있다고 했을때 우리는 어떻게 살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해보아야 한다.

여기의 반전은 새로운 세대는 과연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일까? 혹시 나의 뇌가 저장된 하드디스크를 가진 '길가메시 프로젝트'의 결과물인 나는 아닐까.





사피엔스

*인간 가소성의 원인

28페이지
인간은 직립보행을 한다 -> 그래서 두손을 사용하게 되었다. 하지만 원래 머리가 작고 네발로 지탱하는 골격을 가지고 있어서
손대신에 허리와 목의 통증을 가지게 되었다.
여성을 특히나 직립보행에 의해 엉덩이가 좁아져서 산도(질)이 좁아지고
거기에다가 머리가 커져가는 기간이어서
출산자체가 힘들어졌다.(죽을 확률이 높아졌다)
그래서 이른출산을 선호했다. (아기가 미성숙할때 나온다)
그래서 생명유지에 더 많은 시스템이 발달했다. (사회적인 시스템)
미성숙한 아기를 키우는데 식량을 조달하기 힘들었고, 가족 및 이웃의 도움이 필요했다.

대부분의 포유동물은 자궁에서 나올떄 유약발라 구운 도자기로 나와서 재형성이 힘듬
하지만 사피엔스는 용광로의 유리 덩어리처럼 자궁에서 나오기때문에 다양하게 가공이 가능하다
(불교도, 천주교도, 자본주의, 사회주의, 호전적, 평화를 사랑하는 인물)
이것이 인간을 가소성 있게 만드는 결정적인 이유일까. 하는 생각이 듬



*인간이 생태계 파괴를 하는 이유

인간은 매우 연약한 존재여서
날카로운 도구가 있었지만 포식자를 두려워했다.
그래서 식물을 먹거나 육식동물이 남긴 썩은 고기를 먹었다. (특히 골수)
하지만 지속적으로 도구(+불)가 개발되면서 인간은 먹이사슬의 최상위로 올라서게 되었고
다른 동물들이 몇만년에 걸쳐 서서히 그 지위에 오른것과는 달리
인간의 급속한 성장은 다른 생태계의 구성원들이 인간에 대응하면서 진화할 시간이 없었다.
게다가 인간도 최상위 포식자로써 적응에 실패했다.(아노미처럼)
마치 후진국의 독재자에 가깝다.
지위에 대한 공포와 걱정 때문에 훨씬더 잔인하고 위험해졌다.
생태계 파괴를 엄청나게 한다.(전쟁도 서슴없이 한다.)


 *불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

불을 사용했기 때문에 다른 동물의 위협에서 벗어나며 먹이를 쉽게 구할 수 있었다.(산불등을 이용)
고기를 익혀먹을 수 있어서 음식을 소화시키는데 필요한 에너지가 줄어들게 되었고 (창자가 짧아짐)
식사시간도 줄어들게 되었다.
익혀먹는것은 창자가 짧아지게 만들었고 에너지 소비를 줄여 커다란 뇌를 유지시키는데 도움이 됨
또한 불을 이용하여 자연을 제어할 수 있게 되었다. -> 상승기류를 만드는 등
후에 엄청난 발전을 가져다줌


*인간의 언어
인간의 언어는 다른 동물과 다르게 다양한 것을 표현할 수 있다.
심지어 허구를 말할 수도 있다.
허구는 위험하지만
덕분에 집단적인 상상을 할 수 있게 해준다. (신화)
집단적인 상상은 협력을 가능하게 한다.(애국심, 단군신화 등으로 결속 시킴)
그래서 자연적, 친말감을 토대로한 무리는 고작 100여명 정도만 결속시킬수 있지만
집단적 상상은 보다 더 많은 숫자의 무리를 결속시킬 수 있게 된다.
유한회사를 창조해 냈다. (회사에는 책임이 있지만 개인에게는 책임이 없다)
픽션을 통하여 자신들의 사회적 행태를 바꾸었다. (자연적 DNA로는 거의 불가능)
달러가 가치있다는 픽션을 통하여 무역을 한다.
수십명이 협력하는 사냥 기술을 개발한다.(다른 무리와 결탁한다)
인지혁명으로 인해 복잡한 정보를 제공하고(사자를 피하는 복잡한 행동을 계획, 수행)
사회적 관계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고(규모가 더큰 집단형성)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것들(부족정신, 인권)에 대하여 정보를 전달함(낮선사람과 협력)
 
-> 문화라고 부름


*자연은 가능하게 하고 문화는 금지한다.
문화는 부자연스러운 것을 금지한다고 주장한다.(동성애, 쾌락을 위한 섹스)
하지만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부자연스러운것이란건 없다.
자연스러움과 부자연스러움은 생물학이 아니라 기독교 신학에서 온것이다.
입은 음식섭취를 위해 생겼지만. 말을하고. 키스도하고. 수류탄 핀을 뽑기도 한다.
날개도 처음에는 햇빛을 흡수하기 위해 몸의 표면적을 늘리기 위해 생겼지만
날기위한 용도로 변질되었다.
침팬치도 정치적 유대를 강화하고 친밀한 관계를 만들고 긴장을 완하하는데 성관계를 이용한다.
그러면 이것은 부자연스러운것인가?


*생물학적 성과 사회적 성
여성의 자연스러운 기능은 애를 낳는것이라는 주장은 타당성이 없다.
남성성과 여성성은 생물학적 실체보다 이간의 상상력을 더 많이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자는 단지 생물학적이라는 것을 넘어 그 사회가 생각하는 인간의 질서상 중에 남자를 의미한다.
(역할, 권리, 의무-정치참여, 투표권, 군복무)
여자는 역할, 권리, 의무(-아기키우기, 폭력으로 부터 보호, 남편에게 복종)
그래서 남성성과 여성성의 의미는 사회에 따라 다르다.
또한 끊임없이 변화한다.
남성적 특질이나 여성적 특질은 문화적이기 때문에 자동으로 그렇게 쳐주지 않는다.
또한 자격을 얻었다고해서 계속 유지되는 것도 아니다. (평생동안 증명해야 한다.)
또한 자신이 남자라는(여자라는) 사실을 평생동안 확신시켜야 하며, 특히 남자는 그것을 잃을까봐 평생을 두려워 하며 살아간다.
농업혁명 이후부터 부계사회였기 때문에, 남성적이라고 평가받는 속성들은 여성의 그것에 비해 더 높은 가치를 부여받는다.
이것은 너무나 보편적이어서 우연한 사건에 의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 이유는 모른다. 세계곳곳에서 발견된다.)

*남성이 우월하다고 평가받는 근거 비판해보자

근력적인 측면
남자가 힘이 강하다는 이론(근력)은 평균적, 특정한 종류의 힘에 국한된다.
(여자가 굶주림, 질병, 피로에 대한 저항력이 남자보다 크다. 그리고 육체적 노력이 필요없는 직업(사제,법률가,정치인)에서도 여자들은 항상 배제되어 왔다.-육체적 힘과 사회적 권력은 상관관계가 떨어진다.60대가 20대에게 권력을 행사한다.)
호모사피엔스도 신체적 능력만 본다면 먹이 사다리의 중간쯤에 위치해야한다.
우리가 최상위에 위치하는 이유는 정신적, 사회적 기량 덕분이다.

공격성의 결과
전쟁은 남자만의 특권이다. 되풀이 될 수록 사회에 대한 남자의 통제력이 커진다.
하지만 전쟁의 결실을 획득하는 것은 공격성의 결과가 아니다.
병사가 승진해서 장군이 되는 경우는 없으며. 오히려 최상위는 사회적 신분에 의해 처음부터 차별적으로 제공되는 경우가 많았다.(요즘의 사관학교 처럼 높은 지위의 사람들은 높은 계급부터 시작했다. 나폴레옹도,  유비도, 조조도)
따라서 체력이나 테스토스테론(남성호르몬)등이 높은 지위로 연결되지 않는다.

생물학적인 측면
남자는 여성을 임신시키기위해 다른 남자와 경쟁을 해야했고
그에따른 결과로 가장 우월한 유전자들이 후대에 물려졌지만
여자들은 임신과 양육적인 부담에 의해 남자의 도움이 필요했고
따라서 순종적이고 집안을 잘 돌보는 유전자가 후대에 전해졌다. (강한 권력을 가진 여자는 자신의 유전자를 다음세대에 남기지 못했다.)
하지만 여자들은 꼭 남자에 의존해야 했는가에 대한 의문이 있다.
코끼리는 모권적인데 암컷들로 구성된 네트워크를 이용하여 새끼를 키우며
비협력적인 수컷은 도태된다. 암컷들이 힘을합쳐 수컷을 괴롭히고 공격하다.
사피엔스는 협력이라는 사회적 기술을 이용하여 성공한 개체인데
협력의 기술이 떨어지는 남성이 여성을 통제하는것은 어불성설이다.
오히려 경쟁이 아니라 협력을 잘하는 것이 특징일 수 있다.(협력을 잘하는 남자)

*문화
문화는 거시적으로 보았을때 통일의 방향으로 움직인다.
어떤 사회적 동물도 자신이 속한 종의 전체적 이익에 이끌려 움직이지 않는다.
하지만 사피엔스는 우리와 그들을 나누었다.
보편적인 질서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인류 전체를 하나의 단위로 상상했다. 인류 전체를 우리라고 생각했다.
최초의 보편질서는 화폐(상인), 정치(제국주의-정복자), 종교(예언자)들이었다.
이들은 어디에나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경제질서를 세우고 싶어했다.
최근의 보편질서는 돈(황금)이다. (미국의 문화, 종교, 정치를 증오하는 사람도 달러를 사랑한다)

*불교
세계의 종교들은 신이라는 초 자연적 실체에 대한 믿음에 초점이 있다.(일신교, 다신교)
하지만 불교는 세상을 지배하는 초인적인 질서는 신의 의지와 변덕이 아니라 자연법칙의 소산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기쁨이 있을때 즐거움이 사라질까봐 두려워 하거나 더커지기를 희망하고
고통이 있을때 고통을 피하려고 노력한다
마음은 늘 불만스러복 평안에 들지 못한다.
그래서 고다마는 즐거운일이나 불쾌한일을 경험했을때 마음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다면 고통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명상을 통해서 가능하며 ‘지금과 다른 어떤 경험을 하고 싶은가’ 보다 ‘지금 나는 무엇을 경험하고 있는가’를 생각하도록 훈련 시킨다.
집착이나 환상을 일으키는 살생, 음행, 도둑질을 피하면 만족과 평온의 상태가 되는데 이것이 바로 ’열반’이다.
보통 종교는 ‘신은 존재한다. 그분은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가?’
불교는 ‘번뇌는 존재한다. 나는 거기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이데올로기와 종교
이데올로기와 종교는 비슷한 부분이 많다.
종교는 인간의 규범과 가치(규칙) + 초인적 질서에 대한 믿음(진리)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
인본주의적 종교는 호모사피엔스를 숭배한다.(그들은 다른동물과는 다른 신성한 성질이있다.)
1) 자유주의적 인본주의 - 인간성은 개인의 자유(내면)에 있다. 이런것은 인권으로 보호된다.
살인은 인간이라는 신성한 본성의 침해라 최대한 ‘인도적’이라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처벌한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다’ ->이것은 기독교적이다.->개인은 하나님이 만든걸 빼고 특별할 이유가 있는가? ->과학기술은 인간의 자유의지보다 호르몬, 유전자, 시냅스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생물학을 법, 정치학과 구분하는것은 앞으로도 가능할까?)
2) 사회주의적 인본주의 - 인간성은 집단적인 것이다. 호모사피엔스 종을 신성하게 본다
인간의 자유보다 평등을 추구하며 불평등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모독이다
->이것도 기독교적인 하나님앞에서 평등하다는 일신론적인 속성이 있다.
3)진화론적 인본주의 ->국가사회주의, 나치 - 인간성은 진화하거나 퇴화할 수 있다.
그래서 인류의 퇴화를 막고 진화를 부추기기 위하여 가장 발전된 아리아인을 가장 퇴화된 유대인, 집시, 동성애자로 부터 격리하거나 그들을 근절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백인우월주의)
이것은 그당시의 많은 연구(인종중 아리아인이 가장 뛰어나다는 논문)들로 인해 지지받았고 정치사회적인 유산들은 백인우월주의를 낳아 나치가 망한 이후에도 세계 사회에 남아있었다.


*과학 혁명
과학은 모른다는 것을 인정한다.
예전에는 모른다는 것은 한개인은 모른다(누군가는 알고있다) or 중요하지 않은것을 모른다(거미가 거미줄을 치는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다) 만 존재했다.
예전에도 중요한것을 모른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존재했지만 그들은 박해당했다.(하나님은 중요한건 다 아신다)
그래서 현대 과학은 무지에 대해서 기꺼이 인정하기 때문에 역동적이고, 유연하며, 탐구적이다. 현재의 지식도 잠정적인것이다. 라는 가정은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효과적으로 협력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러면 이것으로 어떻게 정치 사회 질서를 유지했을까?(비과학적인 방법에 의존해야했다)
1) 하나의 과학지식을 진리라고 선포하는방법(나치의 방법)
2)과학을 버리고 절대진리에 따라 사는것(인본주의)

*과학혁명에서 관찰
과학은 경험적 관찰을 모른다음 수학적 도구의 도움을 받아 하나로 결합한다.
신은 모든것을 안다는 주장하에서는 관찰의 필요성이 제한적이었지만 현대인은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새로운 지식을 찾아볼 필요가 있고, 오래된 지식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관찰을 통해서 새로운 지식을 탐구하려고 했다. 물리학자의 임무는 아인슈타인을 뛰어넘는것이다.

또한 과학은 수학을 통하여 설명한다.(과거에는 이야기, 경전 이었다)
뉴턴은 방정식을 통하여 우주 원리를 설명하고, 이것에 해당되지 않는 원리는 다른 방정식을 만들어냈다.
스코틀랜드의 목사는 생명보험 기금을 만들어 목사의 미망인과 고아에게 연금을 지급하기로했다.
그를 위해서는 신께 기도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사망연령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여 목사의 사망 시기를 예측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서 얼마나 기금을 내어야 할지 결정할 수 있었다.
이런 통계, 확률 모델은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핵심이 되었다.


과학과 기술의 결합은 얼마되지 않았다. 과학의 발달이 기술의 발전을 가져온다는 것은 지금에는 상식이지만 예전에는 기술의 발전은 제작자의 시행착오의 결과이거나 다른 제작자의 천재성 덕분이었다.
현재는 매우 다양한 분야에서 과학의 발달이 기술의 진보를 가져오며
대표적인 분야는 전쟁이다. 전쟁에서 신무기의 개발은 과학자들에 의해서 개발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테러리즘의 해결책이 정치가 아니라 완벽한 MD체계 및 테러리스트를 조기에 발견하고 제거하는 기술의 발달에 있다고 믿는다.
예전에는 전쟁의 승리를 위해서는 군사 기술보다 병참, 전략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요즘은 과학과 산업, 군사기술이 자본주의와 산업혁명으로 등장하면서 그것이 자신을 방어하고 돈을 벌어줄 수 있다는 생각때문에 과학혁명이 일어났다.


*과학 연구
과학은 다른 문화와 마찬가지로 경제적, 정치적, 종교적 이해관계에 의해 형성된다.
우유 생산량을 10퍼센트 감소시키는 암소의 유선 감염질환연구와 암소가 송아지와 떨어지게 되었을 때 정신적 고통을 받는지에 대한 연구중 사회 전체의 지원을 받을 연구는 무엇인가.
슬프게도 암소 유선염에 대한 연구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낙농업계의 영향력이 동물 권리운동보다 강하기 떄문이다. 하지만 암소가 신성시되는 힌두사회나 동물권 보호에 전념하는 사회였다면 분리의 고통에 투자될 것이다.
이처럼 경제적 지원은 그 사회의 권력에 의해 결정되고 따라서 그사회의 권력의 입맛에 맞게 연구의 방향이 정해진다.
한마디로, 과학연구는 모종의 종교나 이데올로기와 제휴했을 때만 번성할 수 잇다. 이데올로기는 연구비를 정당화 한다.

* 제국주의와 과학의 발전
제국주의와 과학의 콜라보는 실로 놀라웠다.
유럽 사람들은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전제로 했기 때문에 세계 여러나라들을 탐험하려고 했다.
이것은 제국주의와 결탁하여
멕시코에 존재하던 아즈텍 문명을 제압하고 후에 칠레 등지의 잉카 문명도 제압했다.
그들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치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을 찾아온 유럽인들은 적어도 그들보다 미지의 땅에서 자신이 전혀 알지 못하는 상황에 대처하는 법에 대한 경험과 지식이 많았다. 그들에게 미지를 향해 뛰어드는것은 매우 신나는 일이었다.
중앙집권적 정치구조에 반대하는 세력을 이용하여 문명을 정복했다.
유럽인들에게 제국 건설은 과학적 프로젝트였고 과학은 제국의 프로젝트였다.
영국은 인도를 정복하면서 고고학자, 인류학자, 지리학자, 동물학자를 데리고 그들을 측량하기 시작했다.
에베레스트를 측정하고, 금광의 위치를 조사하고, 희귀 거미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고대 인도 언어들의 기원을 추적하고, 잊혀진 유적지를 발굴하는 수고도 했다.
영국은 현지인들이 모르는 설형(쐐기)문자를 해독하기도 하고 그들의 언어를 분석하기도 했다.
과학은 이런 제국에게 이데올로기적 정당성을 제공했으며, 이런 끊임없는 지식의 생산은 제국에게 진보적이고 적극적인 사업을 추진한다는 이미지를 제공했다.
게다가 제국에 의해 축적된 새로운 지식은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피지배 민족을 이롭게 해고 진보의 혜택을 가져다 줄 수 있었다. (의료, 교육, 철로, 운하, 정의, 번영)
작가 러디어드 키플링은 ‘백인의 짐’ 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이 부유해지는데 관심이 있었다.
또한 과학은 (생물,인류,언어학자)들은 모두 유럽인들은 다른 인종에 비해 우월하며 따라서 이들을 지배할 권리를 가진다는 과학적 증거를 제공했다.
정리하자면
제국주의 프로젝트에 실용적 지식, 이데올로기적 정당화, 기술적 장치를 공급했다.
정복자들은 과학자들에게 정보와 보호, 프로젝트지원, 지구 곳곳에 과학적 사고 방식을 퍼뜨림으로 보답했다.

*제국주의와 자본주의
사람은 신용이라는 특별한 가치 때문에 돈을 빌릴 수 있다.
실제로 존재하는 돈이 100만 달러라도 은행은 10배까지 빌려 줄 수 있따.
과거에는 지금 살고 있는 시대보다 미래가 지금보다 더 나으리라는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부는 한정되어있어서 자신의 부를 축적하는것은 다른 누군가의 희생을 바탕으로 형성될 수 있는것이었다.
그래서 돈을 많이 버는것은 죄악이라고 결론 내렸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것보다~~
미래가 지금보다 나을거라는 신뢰는 -> 신용을 낳고 -> 빠른 성장을 가능케 하며 다시 신뢰를 낳았다.
네덜란드는 사법의 분리와 신용(돈을 제때 갚은)으로 인해 막대한 부를 창출했다.
네덜란드에 빌려준 돈은 언제나 기일에 맞춰 전액이 상환 되었으며, 그 신용은 다른 사람들에게 널리퍼져 동인도회사 라는 합자 회사를 설립하게 되었고, 회사의 이득을 나눠받을 수 있는 증거인 유가증권은 오늘날 주식 시장이 되었다. 동인도 회사의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는 2백년동안 회사에 의해 통치 받았고 1800년이 되어서야 국영식민지가 되었으며 이후 150년간 지속 되었다.
그에반해 스페인은 약속한때에 돈을 갚지 않았고 소송을 제기해 봤자 사법권이 명확히 분리되어 있지 않아 언제나 스페인 국왕의 편에 섰기에 신용이 낮았고 돈을 모으기 힘들었다.
지금의 맨하튼에 있는 월스트리트는 네덜란드가 만들었던 성벽위에 세워진 길이다. 네덜란드의 서인도회사는 이곳에 뉴암스테르담이라는 정착지를 건설했다. 이 식민지는 원주민의 위협과 영국인의 공격으로 인해 1664년 영국의 소속으로 넘어갔고 영국은 뉴욕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프랑스의 미시시피사는 미시시피 하류의 연안지역을 식민지로 만들고 뉴올리언스 시를 건설했다.
이런 계획에 자금을 모으고자 파리 시장에 주식을 팔았으며, 이곳은 막대한 부와 기회의 땅이라고 소문이 났다. 파리의 모든 사람들은 전재산을 털어 이회사 주식을 구입했으며 처음에 50리브르였던 가치는 1만리브르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몇일지나지 않아 공황이 시작되었고 사람들은 매도물량을 쏟아냈다. 프랑스 중앙은행은 가격을 안정시키기위해 주식 매입을 지시했으나 폭락을 막지 못했고, 프랑스 정부는 돈을 찍어내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것은 프랑스 재정 시스템 전체를 거품으로 몰아갔다. 프랑스는 점점 돈을 빌리기 어려워졌고 몇몇의 왕을거치며 프랑스 전체가 파산을 향해 달려갔다. 1789년 그는 마지못해 의회를 소집했고(삼부회) 프랑스 혁명은 시작되었따.
그에반해 영국은 자본주의와 제국의 관계가 더욱 공고해져서, 주식회사는 식민지를 개척하기보다는 정치권력과 결탁했다.
이런 움직임은 중국과의 무역에서 아편을 팔았고, 중국이 아편 수입을 거부했지만 마약 카르텔들은 정부에게 행동에 나서라는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 이것이 아편전쟁이다.
또한 전쟁자체가 아편처럼 재화가 될수 있었는데, 그리스인이 오토만 제국에 반란을 일으켰을때 반군 지도자들에게 그리스 반군 공채를 발행하게 했고 그리스 반군이 전쟁에서 질 위기에 처하자 영국은 국제함대를 조직하여 오토만 제국과의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이로써 그리스는 마침내 자유를 얻게 되었지만 자유는 엄청난 빚과 함께 왔고 독립된 그리스는 이를 갚을 방법이 없었다.
요즘 국가 신용 등급은 경제적 데이터 + 정치 + 사회 문화적 요인을 고려해서 매겨지는데
천연자원이 없더라도 평화, 사법제도의 공정성, 자유정부는 신용등급을 높게 받을 수 있고, 싼대가로 많은 자본은 모아 좋은 교육제도를 지원하고 하이테크 산업을 육성하는데 사용할 수 있다.
열렬한 자본주의자들은 자본은 정치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야 하지만 정치가 자본에 영향을 주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정부가 가장 현명하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시장은 그 자체만으로 사기, 도둑질, 폭력으로 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다. 법을 만들고 경찰, 법원, 교도소를 설립하고 지원함으로써 신뢰를 보장하는 것은 정치가 할 일이다.
이기적인 탐욕은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 하지만 그것은 이윤이 다시 투입되어 더 많은 고용에 활용 될 때에만 적용된다. 오히려 고용인이 피고용인의 월급을 깎고 근로시간을 늘리는 방법으로 이윤을 늘린다는 상황이라면 피고용인들은 대우가 좋은 회사로 옮기는 것이 원래의 논리다. 하지만 독점, 단합등은 노동자들의 일터를 바꾸는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특히나 빚을 갚기위한 노역, 노예제도를 통하여 현 사태를 더 나쁘게 몰아가기도 한다.

*국가와 공동체
예전에는 가족내에서 모든것을 충당했다.
병에걸리면 보살피고, 늙으면 아들딸이 연금이었고, 누군가 죽으면 가족이 남은 고아를 돌보았다. 오두막을 원하면 일손을 보탰고, 사업을 하려고하면 자금을 조달했다. 결혼을 하고자 하면 후보를 고르거나 최소한 심사를 했다. 이웃과 분쟁이 생기면 가족이 끼어들었다.
병이 너무 심하게 걸려 가족이 어떻게 다룰 수 없을 정도가 되거나, 너무큰 투자를 필요로 하거나, 이웃과 분쟁이 폭력으로 확대되는 경우 지역 공동체가 해결사로 나섰다.
시장도 있었지만 이런것은 10퍼센트도 되지 않았다.
국가도 멀리 떨어진 곳의 공동체  일에 개입하기에는 수송과 통신이 너무 불편해서 과세와 폭력 행사를 공동체에 양도하고, 그 공동체 내의 최 연장자가 결정하도록 했다.]
그렇다고 그것이 이상적인것만은 아니었다. 가족과 공동체를 잃어버린 사람은, 직업도 없고, 교육도 받지못했으며 병들고 곤궁할때 도움 받을 곳이 없었다.
살아남으려면 새로운 가족이나 공동체를 찾아야 했다. 찾지못하면 다른집의 하인이 되거나 군대, 매춘굴에서 살아야 했다.
산업혁명은 시장에게 새힘을 주었고, 국가에는 통신과 수송수단을 제공했다.
가족간의 피의 복수는 경찰이 막았고, 법원의 판결로 대체했다.
국가와 시장은 ‘개인이 되어라, 네가 원하는 사람과 결혼하라, 네게 맞는 직업을 택하라, 네가 원하는 곳에 살아라, 가족이나 공동체에 얽매이지 말아라, 국가와 시장이 식량, 주거, 교육, 의료, 복지, 직업을 제공할 것이다. 연금과 보험으로 보호해줄 것이다.’ 라고 이야기했다.
공부를 하고 싶다면 공립학교가, 사업을 하고싶다면 은행이, 집을 짓고싶다면 건설회사가 지어주고 은행이 융자해주며 국가가 보조금을 지급하거나 보증을 서 주었다.
돈이 있다면 고급 양로원에서 노년을 보낼 수 있으며, 과세 당국 또한 우리를 개인으로 취급하여 다른사람의 세금을 대신 낼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역사에서 여자는 가족과 공동체의 재산으로 취급되었지만 현대국가는 여성또한 하나의 개인으로 보았다.
하지만 개인의 해방은 가족과 공동체를 상실한 데 대해 슬퍼하며, 인간미가 없는 구가와 시장이 우리삶에 미치는 영향력 때문에 소외되고 위협당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는 진화의 결과로 스스로를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생각하면서 살아 가도록 설계되었지만 2세기 만에 우리는 소외된 개인이 되었다.
원래 국가와 시장은 그들이 제공할 수 없는 사적인 욕구를 가정에게 요구했지만, 요즘에는 연애 및 성생활 방식에 미치는 영향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중매 또한 시장의 몫을 발전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공동체에 대한 욕구를 완전히 무시할 수 는 없었다. 그래서 국가와 시장은 상상의 공동체를 육성할 필요가 있었고, 그것은 국민과 소비 공동체이다.
우리는 스스로 하나의 뿌리에서 나왔다는 상상을 하고, 국가의 존재를 믿으며, 상징을 보고 흥분하고 국가를 위해 돈과 시간과 노력을 쓰게 한다.(올림픽 대표팀 경기라던지)
요즘에는 국가보다 소비공동체가 더 강력한데, 팬클럽이 대표적인 예이다. 공연티켓, CD, 포스터 등을 구입하며 자신이 누구인지를 규정한다. MU의 팬들, 채식주의자들, 환경주의자들도 마찬가지다. 채식주의자들은 채식주의자와 결혼하는 쪽을 선호할 가능성이 크다.

* 전쟁
1945이후 제국주의는 철저히 평화로운 은퇴의 길을 걸었다. 영국이, 프랑스가, 소련이 그랬다. 그들이 후퇴하면서 벌어지는 민족간의 분쟁은 역사적 평균과 비교하자면 평화와 질서의 모범이었다.
예전의 모든 나라는 인접국가와 전쟁을 시작하기위해 1년짜리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것을 가지고 있는 나라가 드물다. 왜 요즘은 평화가 널리 퍼져있어 전쟁의 위협이 줄었을까?
1) 전쟁의 대가가 커졌다. 핵무기는 전쟁을 집단자살로 바꾸어 놓았으며, 군대의 힘으로 세계를 지배하려는 시도는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2) 전쟁의 비용은 커졌고 이익은 작아졌다. 예전에는 들판, 가죽, 노예, 금 등을 약탈할 수 있었지만 지금 할리우드나, 실리콘 밸리로 쳐들어가서 그것들을 빼앗아 올수는 없다. 지금도 중동의 유전은 그런역할을 일부 하고 있지만 그것을 획득했을때 유지하기 위한 비용은 획득에 비하여 높지 않다. 차라리 그곳에 투자를 하는 편이 이득이 높다.
3) 역사상 많은 엘리트는 전쟁을 선으로 보았다. 다른사람은 필요악이었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바꾸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우리시대는 평화를 사랑하는 엘리트가 세계를 지배하는 역사상 최초의 시대이다.

*행복
달에 착륙한 암스트롱은 동굴에 손자국을 남겼던 이름 로를 수렵 채집인보다 더 행복했을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화폐, 제국, 과학, 산업을 발전시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인지 혁명이 일어난 이후 7만년의 세월은 세상을 더욱 살기좋은 곳으로 만들었는가?
돈은 일정수준까지는 행복을 보장해 주지만 더이상 행복을 이끌지는 못한다.
병도 일시적으로는 불행하다고 느끼게 되지만 병이 더 나빠지지만 않는다면 사람들은 새로운 상황에 적응한다.
가족과 공동체는 우리의 행복에 더 큰 영향을 준다. 결혼은 특히 더 중요하다. 좋은 결혼은 행복과, 나쁜결혼은 불행과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렇다면 지난 2세기 동안 물질적 조건이 개선된 효과가 공동체의 붕괴로 상실되어 행복은 비슷할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행복이 부와 건강, 공동체와 같은 객관적 조건에 의해 좌우되기 보다는 그것과 자신의 기대사이에 상관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하지만 자신이 1세계에 속한다고 해서 행복할까? 오히려 1세계에 속해있어서 걱정할 일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과학자들은 우리의 정신세계와 감정새계가 생화학적 체제의 지배를 받는다고 생각한다.
월급이나 사회관계, 정치적 권리와 같은 외부의 변수가 아니라 신경, 뉴런, 시냅스, 호르몬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한다.
진화의 결과 우리는 너무 불행하지도 행복해하지도 않게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일시적으로 몰려오는 쾌락적 감각을 누리게 했지만 그런 느낌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진화는 남자로 하여금 임신가능한 여자와 성관계를 통하여 유전자를 퍼뜨리면 쾌감이라는 보상을 주지만, 오르가즘이 계속된다면 행복한 남자는 음식에 흥미를 잃고, 다른 임신가능한 여자를 찾는 수고를 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마치 온도가 설정된 에어컨이나 히터처럼, 행복조절 시스템 역시 사람마다 다른 온도에 맞춰져 있다.
기분 나쁘거나 기분 좋은것도 후에는 자신이 맞추어 놓은 원래의 설정값으로 돌아오게 마련이다.
하지만 완전히 심리적, 사회적 영향력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좋은 배우자와 결혼하면 행복조절 시스템은 (상한과 하한을 넘기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중간 어느지점에 있느냐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이런 생물학적 접근법을 받아들인다면 역사의 발전은 행복과 별 상관이 없다.
초가집에 살던 사람이 기와집에서 살때와 현재 임대아파트에 살던사람이 펜트하우스에 살때 그 행복지수는 같다. (펜트하우스라고 더 높은건 아니다)
이렇게 행복지수가 생화학적이라면 우리는 정치적, 사회적 개혁이나 반란이나 이데올로기에 시간을 그만 낭비하고, 우리를 정말로 행복하게 해줄 수있는 생화학 시스템을 조작하는 일에 집중 할 수 있다.
일례로 항우울제는 세로토닌 수치를 높여줌으로써 사람들을 우울증에서 빠져나오게 돕는다.
하지만 쾌감과 행복은 같은 것일까? 아이를 양육하는 일은 상대적으로 불쾌한 일이지만 대부분의 부모는 아이가 행복의 주된 원천이라고 말한다.
행복은 중요한 인지적, 윤리적 요소가 존재한다. 스스로를 아이 독재자의 노예라고 볼 수도 있고 사랑을 다해 새 생명을 키우고 있는 사람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니체의 말대로 살아야할 이유가 있다면 당신은 어떤 일이든 견뎌낼 수 있다. 삶은 고난일 지라도 지극히 행복할 수 있다.
중세 사람들이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고 새로운 성당을 짓는데 찾았던 의미는 과학자들이 자신은 인간의 지식을 증가시키는데 찾았던 의미와 동일하다.
그러므로 행복의 관건은 개인의 환상을 집단적 환상과 일치시키는데 있을지 모른다.
개인적 내러티브가 주변사람들의 내러티브와 일치하는 한 내 사람이 의미 있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고 그것이 행복과 연결된다. 하지만 이것도 우울하다. 개인의 인식체계에만 행복의 여부가 달려있을까?
행복이 자신에게 충실하고, 내면의 소리를 따르라는 의미는 현재의 지배적인 종교인 자유주의의 구호이다. 행복이 주관적이며, 자신이 행복한지 그렇지 않은지 가장 잘 안다는 것이다.
주관적인 느낌은 행복의 절대적 척도가 아니다. 마약을 하고 있는 사람처럼, 어느곳에 빠져 있는 사람이 가지는 행복이 올바른 것이 아니다.
불교는 특이한 입장을 취한다. 행복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일어나는 과정의 결과라는 것이다.
불교에 따르면 사람들은 행복을 즐거운 감정으로, 고통을 불쾌한 감정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점점더 많은 즐거움을 추구하는 한편, 고통을 피하려고 한다.
하지만 감정이란 매순간 변화하는 파도와 같아서 5분전과 지금이 다르다. 한번 불쾌한 감정을 몰아내고 행복한 감정을 찾는데 성공해도 곧바로 다시 반복해야한다.
불교에서는 번뇌의 근원이 고통, 이런 감정의 반복이 덧없음이 아니라 순간적인 감정을 무의미하게 끝없이 추구하는데 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불안감에 놓여 항상 만족하지 못하며, 심지어 기쁠때도 기쁨이 사라질까봐 두려워서 만족스럽지 않다.
번뇌에서 벗어나는 길은 덧없는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 감정이 영원하지 않다는 속성을 이해하고 이에대한 갈망을 멈추는데 있다. 감정을 추구하는것을 멈추고 그냥 지금 이순간을 살면 완전한 평정을 얻게된다.
현대 사회는 외적인 조건보다 내면의 느낌에 귀 기울이라고 이야기하지만, 부처는 주관적인 느낌이나 감정의 추구 역시 중단하라고 이야기한다.
불교에서 행복의 비결은 자신의 진실한모습(정말로 어떤사람인지)를 파악하는데 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행복은 지금의 감정이 아니라 자신을 알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호모사피엔스의 종말
인간은 지금까지 유일하게 자연의 법칙을 뛰어 넘으려고 하고 있다.
자연은 지적인 설계자 없이 자연 선택적으로 발전해 왔다.
하지만 인간은 굼뜬 가금류를 선택적으로 교배시켜 양계장을 만들었다.
브라질의 생물예술가는 프랑스의 연구소와 접촉해 토끼의 배아에 해파리의 유전자를 삽입하여 녹색형광토-’알바’를 만들었다. 이것은 지적 설계의 산물이며 앞으로 올것에 대한 선구자이다.
지난 40억년이 자연 선택의 기간이었다면 ‘알바’는 새시대의 새벽이다.
인간은 황소(ox)를 거세해 농사를 위한 황소(Bull)을 만들었다. 또한 자기종의 수컷도 거세했다. 매력적인 목소리의 소프라노 가수를 위해, 왕을 돌볼 환관을 만들기 위해서 수천년간 활용해왔다.
하지만 현대는 남자를 거세하는 것을 넘어 호르몬 치료를 통해 아예 여성으로 바꿀 수 있다. 이를 넘어 생쥐의 등에 소의 연골을 이식하여 인간의 귀처럼 보이는 무언가를 만들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고 현재 우리는 조작하는 생명체의 대부분(식물, 곰팡이, 박테리아, 곤충)은 정치적 로비능력이 가장 적은 것들이다. 이미 대장균의 유전자를 조작해 바이오 연료를 제작한다. 또 대장균과 곰팡이의 유전자를 조작해 인슐린을 생성하며, 물고기에서 추출한 유전자를 감자에 삽입해 서리에 저항력을 가지게 만들기도 했다. 젖소 또한 유선염탓에 해마다 수십억 달러의 피해를 입기 때문에 리소스타핀-유선염을 일으키는 박테리아를 공격하는 효소-를 포함된 우유를 생산하도록 유전자 조작 젖소를 실험중이다. 돼지 산업은 돼지의 지방이 건강에 해롭다며 매출이 줄자 벌레에서 추출한 유전물질을 가지고 시험하고 있다. 몸에 해로운 오메가6 지방산을 건강에 이로운 오메가3 으로 바꾸기 위함이다.
또한 매머드를 복원하는데 이어 네안데르탈인을 복원하고 싶어한다. 그들은 사피엔스 두배의 육체노동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주된 장애는 윤리적, 정치적 반대이다. 하지만 인간의 수명을 연장하고 불치병을 정복할 수 있다면 반대는 순식간에 누그러지고 만다.
우리가 유전자를 주멀럭거린다고해서 반드시 멸종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더이상 호모사피엔스가 아니게 될 가능성은 있다.


사이보그또한 생명의 법칙을 바꾼다. 사이보그 곤충을 이용하여 적의 정보를 듣고, 사이보그 상어를 통해 적의 잠수함을 찾는다.
사피엔스 역시 사이보그로 변하는 중이다. 최첨단 보청기는 인간의 목소시를 식별하고 전기신호로 번역하고 중추청각신경, 뇌로 전달하게 만든다. 망막임플란트는 빛을 흡수해 전기에너지로 바꾸고 망막의 신경세포를 자극해 뇌는 무엇이 보이는지를 파악하게 할 수 있다. 시카고 재활연구소의 팔은 생각으로 작동한다. 심지여 식물인간의 뇌에 전극을 심어 뇌어 정보를 수집하게 만들고 이 실험이 성공한다면 외부세계와 의사소통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기술을 사용하여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게 될것이다.


완전히 무생물적인 존재를 제작할 수 도 있다.
대표적인 예는 컴퓨터 바이러스이다. 원형은 존재하지만 스스로 경쟁하면서 퍼져나가고 또다른 돌연변이가되어 더 잘 살아남고 번식할 것이다. 알파고가 떠오른다. 아무것도없는 무에서 스스로 학습하여 이세돌을 이겼네..
만약 나의 뇌를 하드드라이브에 백업해서 노트북에서 실행한다면 노트북은 사피엔스처럼 생각하고 느낄 수 있을까? 그것은 나인가, 아니면 다른 누구인가,
2005년 블루브레인 프로젝트는 인간의 뇌를 컴퓨터안에 재창조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있다.
맞춤의학시대, 환자의 DNA에 맞는 치료를 하는 의학의 시대는 이미 도래했다. 머지않아 자신의 질병가능성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도 있으며, 자신에게 꼭 맞는 효과를 내는 약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보험회사는 앞으로 DNA를 바탕으로 보험수가를 책정할 것이다. 우리는 이런 유전적 차별을 이유로 소송할 수 있을까?


현대는 역사상 처음으로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사실을 인정한 시대이다. 하지만 우리는 역사상 유래없는 불평등을 창조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따.
역사적으로 보면 언제나 사회지배계급은 하류계급보다 우수하다는 주장을 펼쳐왔다. 하지만 새로운 의학적 능력의 도움으로 객관적 현실이 될 지도 모른다.


다양한 영화와 소설들은 우월한 존재를 창조하려 시도한 과학자가 스스로 괴물을 만드는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이이야기는 신의 행세를 하려들고 생명을 조작하면 심한 벌을 받게 되리라는 경고 같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호모 사피엔스는 완전히 다른 존재로 대체되는 시대가 올것이라는 사실을 직감하게 만든다.
이런 생각은 사피엔스를 극단적으로 불안하게 만든다. 미래에 우리와 동일한 존재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의 자리가 우리보다 훨씬 뛰어난 생명체가 차지할 가능성은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세상을 구하기 위해 박사가 창조한 괴물들을 파괴해야만 한다는 판타지속에서 위안을 찾는다. 우리가 그런 스토리를 좋아하는 까닭은 우리가 가장 우수하며, 우리보다 우수한 존재는 과거에도 미래에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런 예언들이 정말로 실현할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우리가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은 역사의 다음단계에서 기술적, 유기적 영역뿐만아니라 인간의 의식과 정체성에도 근본적인 변형이 일어나리라는 생각이다.
만약 사피엔스의 역사가 정말 끝난다면 우리는 그 마지막 세대로서 마지막 남은 하나의 질문에 답해야 한다
‘우리는 무엇이 되고싶은가’
이 질문은 사회주의, 공산주의, 남과 여, 종교, 국가, 계급의 논쟁보다 중요하다.
적어도 첫번째 세대는 인간 설계자의 아이디어에 따라 모습이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는 편을 선호한다. 오히려 스킬에 집중한다. 낙태, 줄기세포, 동물복제 등. 하지만 이런 호모사피엔스 업그레이드 프로젝트를 중단하리라는 생각은 순진하다.
이런 모든것은 길가메시 프로젝트와 연관되어있다. 그들은 새로운 육체를 가지고 영원불멸 해지고 싶은 모양이다.
우리는 머지 않아 스스로의 욕망 자체도 설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진정한 질문은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가?’ 가 아니라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 가 될것이다. 우리는 윤리적으로 어떤 존재가 되기 보다는,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소름

‘길가메시 프로젝트’ 죽음을 없애버리려고 했던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영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