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준종 [한국교육의 사회학적 풍경]
2장. 국가자본으로서 학력의 출현과 분화
이 장의 말이 맞다면 (아마도 팩트겠지, 옛날사람들의 말을 인용한거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이 교육을 입신양명의 수단으로 생각했던것은 1920년대 일것이다.
처음에는 실력을 쌓아서 국가를 해방시키자는 실력 양성론에 의해서 개인들을 교육하기 시작했으나,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학교에 다니는 것이 일반사람들에게는 (평민)들에게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보통학교, 고등 보통학교에 재학하는 것은 학비, 학업을 함으로써 일손의 부족, 도시부터 생겨나기 시작한 고등보통학교를 다닐경우에 필요한 유학비 등은 일반사람들에게 학교에 다니는 것 자체를 부잣집 자손이 아닌이상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한것이 1926~1930년대니까
지금도 이런말을 하고 다닌다는 것은 무려 90년 ~100년전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첫째, 예전에는 대학만 졸업하면 선생님 자격을 주었다.
졸업이라는 것은 학교력의 측면이다. 졸업했다는것이 가르칠 실력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것은 아니다.
하지만 예전에는 졸업이라는 것이 능력이라는 등식으로 성립되어 사람들에게 인정받아왔다.
지금도 다를것이 없는것이, 처음만나는 사람에게 절대로 물어보면 안될것 중에 하나가 어느 대학 나오셨어요? 다. 어느 대학을 나온 것에 따라 사람들을 분류하며, 어느 대학인지가 그 사람에 대한 판단을 짓게 만들고 구분한다. 상징적 자본(학력)이 실질적 학력(실력)을 증명하는 시대인 것이다.
지적 다위니즘. 지적으로 우수한 사람만이 생존할 수 있다.
이것도 1921년 박춘파에 의해서 우리나라에 실력을 강조하는 측면이 많이 있었던 시기였다.
학교는 우수한 지능, 강인한 성격, 건강을 갖추고 있는 사람만이 학교교육에서 살아남을 수 있고 여기서 살아남은 사람은 차별적으로 보상한다는 것에 대하여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분위기였다.
현재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무조건 정시, 수능만이 공정하며 수능에 의해서 대학이 결정되고, 대학에 의해서 사람이 판단받는 시대, 즉 현재 시대도 실력이 학력으로 인정되는 시대이다. 실력 학력은 동의어 처럼 쓰인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교육=학력=실력=취업자격 인 것이다.
그러나 모든 학교가 동일하게 평가를 받는 것은 아니었다. 학교간에도 위계적인 차이는 엄연히 존재하였다. 그래서 졸업장에 어느 학교가 적혀있는가는 그사람의 품질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특히나 설립별(공,사립) 학교급별(중,고)등에 따라서 사회적 가치는 당연히 다르게 인식되었다.
보통은 관립학교에 진출하고 싶어 했으며 그것은 관립학교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 첫째 이유이고, 둘째이유는 관립학교 졸업생에게는 관직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특혜가 부여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특혜와 특권은 관립학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학교의 선택이 입신 출세와 밀접한 관계를 맺게되면서 더 평판이 좋은 학교로 진학하려는 경쟁이 계속되었고, 더구나 졸업생들끼리 동창회가 결성되어 그것은 지위집단으로 학벌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학력에 의한 인간차별이 시작되었다.
이런 교육열의 팽창은 출세에 대한 강한 바람으로 시작되었으나 1920년대 사회주의 관점을 중심으로 비판적 논의가 자주 발견된다. (이때 사람들도 참 똑똑하다) 실력이나 재능보다는 사회적 출신에 따라 좌우되는 경우가 많았다. 누가 근대교육의 수혜자인가 - 근대교육은 기회의 불평등이 존재한다는 것을 비판함
누구나 능력만 있으면 지위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경쟁할 자유도 없는 빈자에게 이것은 무의미 하며, 특권계층의 이윤은 공급하는데에 충실한 종이되게 한다(1926 이청우)
실력을 갖춘사람은 오직 유산계급의 자제만 가능한 것이고
실력이라는 것도 결국 체제 순응의 결과물에 불과한 것이다 라고 생각하였다.
1979년이 되면서 근대 = 학력 = 실력, 전통 = 서당 = 허학 이라는 태도가 국민의 교육열에 불을 질렀다.
2장. 국가자본으로서 학력의 출현과 분화
이 장의 말이 맞다면 (아마도 팩트겠지, 옛날사람들의 말을 인용한거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이 교육을 입신양명의 수단으로 생각했던것은 1920년대 일것이다.
처음에는 실력을 쌓아서 국가를 해방시키자는 실력 양성론에 의해서 개인들을 교육하기 시작했으나,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학교에 다니는 것이 일반사람들에게는 (평민)들에게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보통학교, 고등 보통학교에 재학하는 것은 학비, 학업을 함으로써 일손의 부족, 도시부터 생겨나기 시작한 고등보통학교를 다닐경우에 필요한 유학비 등은 일반사람들에게 학교에 다니는 것 자체를 부잣집 자손이 아닌이상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한것이 1926~1930년대니까
지금도 이런말을 하고 다닌다는 것은 무려 90년 ~100년전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첫째, 예전에는 대학만 졸업하면 선생님 자격을 주었다.
졸업이라는 것은 학교력의 측면이다. 졸업했다는것이 가르칠 실력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것은 아니다.
하지만 예전에는 졸업이라는 것이 능력이라는 등식으로 성립되어 사람들에게 인정받아왔다.
지금도 다를것이 없는것이, 처음만나는 사람에게 절대로 물어보면 안될것 중에 하나가 어느 대학 나오셨어요? 다. 어느 대학을 나온 것에 따라 사람들을 분류하며, 어느 대학인지가 그 사람에 대한 판단을 짓게 만들고 구분한다. 상징적 자본(학력)이 실질적 학력(실력)을 증명하는 시대인 것이다.
지적 다위니즘. 지적으로 우수한 사람만이 생존할 수 있다.
이것도 1921년 박춘파에 의해서 우리나라에 실력을 강조하는 측면이 많이 있었던 시기였다.
학교는 우수한 지능, 강인한 성격, 건강을 갖추고 있는 사람만이 학교교육에서 살아남을 수 있고 여기서 살아남은 사람은 차별적으로 보상한다는 것에 대하여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분위기였다.
현재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무조건 정시, 수능만이 공정하며 수능에 의해서 대학이 결정되고, 대학에 의해서 사람이 판단받는 시대, 즉 현재 시대도 실력이 학력으로 인정되는 시대이다. 실력 학력은 동의어 처럼 쓰인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교육=학력=실력=취업자격 인 것이다.
그러나 모든 학교가 동일하게 평가를 받는 것은 아니었다. 학교간에도 위계적인 차이는 엄연히 존재하였다. 그래서 졸업장에 어느 학교가 적혀있는가는 그사람의 품질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특히나 설립별(공,사립) 학교급별(중,고)등에 따라서 사회적 가치는 당연히 다르게 인식되었다.
보통은 관립학교에 진출하고 싶어 했으며 그것은 관립학교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 첫째 이유이고, 둘째이유는 관립학교 졸업생에게는 관직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특혜가 부여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특혜와 특권은 관립학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학교의 선택이 입신 출세와 밀접한 관계를 맺게되면서 더 평판이 좋은 학교로 진학하려는 경쟁이 계속되었고, 더구나 졸업생들끼리 동창회가 결성되어 그것은 지위집단으로 학벌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학력에 의한 인간차별이 시작되었다.
이런 교육열의 팽창은 출세에 대한 강한 바람으로 시작되었으나 1920년대 사회주의 관점을 중심으로 비판적 논의가 자주 발견된다. (이때 사람들도 참 똑똑하다) 실력이나 재능보다는 사회적 출신에 따라 좌우되는 경우가 많았다. 누가 근대교육의 수혜자인가 - 근대교육은 기회의 불평등이 존재한다는 것을 비판함
누구나 능력만 있으면 지위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경쟁할 자유도 없는 빈자에게 이것은 무의미 하며, 특권계층의 이윤은 공급하는데에 충실한 종이되게 한다(1926 이청우)
실력을 갖춘사람은 오직 유산계급의 자제만 가능한 것이고
실력이라는 것도 결국 체제 순응의 결과물에 불과한 것이다 라고 생각하였다.
1979년이 되면서 근대 = 학력 = 실력, 전통 = 서당 = 허학 이라는 태도가 국민의 교육열에 불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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